휴가지로 한라산을 택한 건, 한 번 쯤 겨울 산 정상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작년에 못 간) 휴가도 받았겠다, 해외여행은 알아보지도 않았겠다, 겸사겸사 제주도행 비행기 표를 끊었습니다. 진에어 티켓을 당일날 2만천몇백 원 주고 샀습니다. 제주는 4년 만의 여행인데, 그 사이 항공요금은 참 많이 내려갔더군요.
첫날 밤에 도착해 제주 마트에서 간단한 안주와 맥주 한두 캔을 흡입한 후 모텔에서 간판을 바꾼 듯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1박. 다음날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대충 씻고 한라산으로 향했습니다. 한라산 도착 시간은 아침 7시 쯤. 코스는 관음사 입구에서 등산을 시작해 성판악 탐방로로 내려오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 코스에 대한 장점은 아래 나옵니다. :)
※모든 사진은 휴대전화(아이폰6)으로 찍었습니다.
관음사 탐방로입니다. 제주시에서 차로 약 15~20분 정도 걸립니다.
제주는 춥지 않았습니다. 출발 당일 제주 아침 기온은 영상 3도, 한라산 정상이 영하 7도였고 한낮에는 예보상 정상이 영하 3도 정도로 예보됐습니다. 등산파카 한 벌과 아버지 등산화, 아이젠을 준비했고, 장갑은 편의점에서 목장갑과 흰 면장갑을 한 켤레씩 사서 가방에 넣었습니다.
관음사 탐방로 입구입니다. 7:05 정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탐방로는 저 건물 왼 쪽에 있는데, 첨에 저는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려다 직원분께 안내를 받고 입구를 찾았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성판악 탐방로 입구와는 달리, 관음사 탐방로 입구는 저 건물과 넓은 주차장 외에 별다른 시설이 없습니다. 등산 시작은 약 7:10 정도.
7:30. 관음사 코스 등산로 입구는 다른 산처럼 평지 숲길 같은 길이 한동안 이어집니다.
제주 기온이 영상이었다고는 하지만, 저기 보이는 물들은 다 얼어 있었습니다. 산은 산. 아직은 눈도 보이지 않습니다. 길은 지루하지 않습니다.
7:53. 본격적으로 눈이 나타납니다.
한 20분 정도 더 올라가니 본격적으로 눈이 쌓인 곳이 나타납니다. 숲길처럼 평지만 걸은 느낌인데, 역시 산은 추운 모양입니다. 그래도 아직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는 눈이 안 보입니다. 이미 40분 가량 걸은 후라 추위는 그리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8:00. 탐라계곡 목교. 3km 가량 올라왔습니다.
한 50분 정도 걸려서 탐라계곡 목교까지 왔습니다. 입구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이고, 여기까지는 힘들다는 느낌이 없지만, 이제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됩니다. 안내판에 보이는 빨간색 선은 탐방로를 따라 오르기 제일 힘들다는 뜻입니다.
... 는 뭐 그런거고, 탐라계곡 목교에 이런 게 있습니다.
각 등반로 정상 직전에 마련돼 있는 대피소를 겸한 휴게소에서 파는 음료수나 라면, 휴지 같은 판매 물품을 나르는 모노레일입니다. 한라산 각 등반로마다 설치돼 있고, 눈이 쌓이지 않았을 때 가 보시면 잊어버릴 때 쯤 '통통통' 소리를 내면서 꼬마열차 같은 데 아저씨들이 뭔가를 가득 싣고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대피소 운영에 꼭 필요한 시설이기는 한데, 뭔가 느낌은...
한라월드 백록담레볼루션.jpg
8:08. 탐라계곡 대피소. 본격적으로 눈길.
목교에서 조금 더 올라온 탐라계곡 대피소부터는 본격적으로 눈이 쌓여 있습니다. 저 쯤부터 아이젠을 발에 묶고 올라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이젠을 신고 등산 한 건 처음인데, 눈이 예쁘게 쌓여 있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여름보다 등산하기 편한 느낌이었습니다. 뭣보다 아이젠 덕에 길에서 발이 미끄러지질 않아요. 아이젠 짱짱맨 ㅠㅠ.
8:22. 좀 더 올라왔습니다. 조금씩 숨이 차기 시작.
조금 더 올라왔습니다. 길이 확 가팔라진 느낌에 숨이 차기 시작합니다. 이 때부터 최대한 쉬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저질체력인 제가 산을 탈 때 활용하는 방법인데, 절대로 앉아서 쉬지 않고 짐 다 맨 상태에서 서서 1, 2분 정도로 아주 짧게 자주 쉬는 방법으로 올라갑니다. 한 번 주저앉아버리면 맥이 빠져서 못 올라가겠더라고요.
8:23. 날씨가 며칠 새 최고로 좋았던 날.jpg
고작 이 정도만 올라와도 한라산은 이 정도의 하늘을 보여줍니다. 이 날 날씨가 무척 맑고 좋았는데, 이런 날이 1년에 며칠 안 된다고 합니다. 제주는 3일 동안 다녀왔는데, 1년 8개월 만의 휴가를 가서 그랬는지, 하늘이 가는 곳마다 최적의 날씨를 선물했습니다.
8:31. 탐라계곡 목교에서 1km 정도 더 올라간 지점.
등산 1시간 20분 째. 숨은 매우 가쁜데, '되게 힘들다'는 느낌까지는 아닙니다. 사진 찍으면서 1분 쉬고, 아래 경치 구경하면서 1분 쉬고 하면서 올라갔습니다. 한라산 주변으로 다른 높은 산이나 건물이 없고, 날씨가 정말 맑아서 간혹 간혹 뒤돌아 내려보는 경치가 최고였습니다.
9:14. 본격적으로 상고대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키 크고 쭉쭉 뻗은 소나무숲 속을 통과하게 됩니다. 소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도 정말 좋은데, 사진으로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소나무 숲을 한동안 올라가다보면, 본격적으로 상고대가 보입니다.
겨울 산을 올라가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요 상고대를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9:20. 정상 직전 마지막 휴게소인 삼각봉 대피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두 시간 좀 넘게 땀 흘리며 올라가니 시나브로 삼각봉 대피소가 코앞에 나타났습니다. 이 쯤 되면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등산객들 잡으라고 만들어놓은 줄이 발 밑에 있는 상황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런 경고 플래카드가 걸려 있긴 한데...
본격 썰매 타고 싶게 만드는 금지 표지판.jpg
0.3km를 더 올라가면, 드디어 삼각봉 대피소가 나옵니다. 그리고 한라산의 절경이 여기부터 시작됩니다.
9:31 삼각봉 대피소.
삼각봉 대피소 쯤 올라오면 그 때부터는 막 찍어도 작품사진이 나옵니다. 여기부터는 숲이 아니고 하늘이 바로 올려다보이는 길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올라가면서 힘은 들지만 경치 보는 맛은 정말 뛰어납니다.
삼각봉 대피소에서는 원래 라면 등 간단한 간식류를 파는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모노레일이 묻혀버리는 바람에 매점은 임시휴업 상태입니다. 늦가을~초봄 사이에 한라산 등반을 하시는 분들은 간식과 물을 꼭 챙겨서 올라가셔야 합니다.
삼각봉 대피소에서 20분 정도 충분히 쉬고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고, 목표인 백록담을 보기 위해 다시 올라갔습니다.
눈이 이 정도. 못해도 2m 이상.jpg
눈이 어느 정도 쌓였냐 하면 이 정도입니다. 워낙에 길이고 뭐고 다 눈에 파묻히다 보니까 실제로 걸어 보면 살짝 아슬아슬한 느낌도 듭니다. 아이젠 짱짱맨.
10:09. 제일 힘든 구간이 시작되기 직전.
여기서부터 피곤하다는 느낌이 강해졌습니다. 경사는 체감상 최소 20도는 되는 느낌이었고, 10분 오르다 1분 쉬고 하던 패턴은 이미 무너져서 1, 2분 올라가다 1분 쉬고 하는 식으로 올라갔습니다. 배는 안 고픈데 허기진 느낌도 강하게 들었던 구간입니다. 정상에 이 정도 가까워지면 상고대가 어느 정도냐면...
그녀의 속눈썹은 길다 + 너 화장 떡졌어 ㅋ.jpg
가장 힘든 계곡을 무사히 올라가고 나면, 그 때부터는 해가 따가울 정도로 하늘이 가까워져 있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10:56. 정말 마지막 구간.
정상까지 1km 정도 남은 구간인데, 올라가는 속도는 정말정말 더뎌졌습니다.
이 쯤 되면 상고대가 문제가 아니라, 등산객들 잡으라고 설치한 줄이...
본격 한라산표 츄러스.jpg
'깔딱고개'를 다 넘고 나면 정말정말 마지막 코스인 계단 길이 이어집니다. 백록담 중 절벽이 낮은 곳으로 등산객들을 안내하는 계단입니다.
11:08. 저 절벽 뒤편이 백록담.
이제 다 올라왔습니다. 날이 좋아서 제주도의 북쪽바다 동쪽바다 남쪽바다까지 모두 내려다보인 최고의 날, 3월 5일 백록담의 모습입니다.
11:25. 백록담.
... 수평선 비뚤어진 건 신경쓰지 않도록 합니다...
백록담 첫 광경이 딱 보이는 순간 숨이 막혔습니다. 산과 숲에 관한 어떤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한라산은 겨울이 가장 좋다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눈이 안 쌓여 있다면 절경을 볼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삼각봉 대피소~백록담까지 이어진 길은 진짜 절경 투성이였습니다.
맨 마지막 사진은 한 시간 정도 백록담에서 초코바도 먹고 놀다가 성판악 탐방로로 하산하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한라산 백록담을 보러 가시는 분들이 대부분 성판악 등반-관음사 하산 코스를 많이 택합니다. 이유는 두 가진데, 하나는 성판악 코스가 워낙 경사가 완만해서 좀 쉬운 코스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관음사 입구가 제주 시와 가까워서 하산 후 제주로 일찍 넘어가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저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았지만) 진짜 한라산의 경치를 느끼려면 관음사로 올라가 성판악으로 하산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성판악 코스는 위 사진을 찍을 때까지 숲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경치 구경을 할 것이 별로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경사가 완만해 쉽기는 한데, 코스 길이가 너무 길다보니 저 쯤 올라올 때 지쳐 있는 건 다 똑같아요.
게다가 성판악 코스는 마지막이 가장 험한 길인 데 반해 관음사 코스는 가장 힘든 마지막 1km가 대체로 쉬운 코스라 마지막 힘을 짜내기도 어느 정도 괜찮아 보입니다.
15:05. 성판악 입구. 약 7시간 55분.
8시간 정도 걸려 하산을 완료했습니다. 보통 8시간 잡고 오르내리면 된다고 합니다. 렌터카를 관음사 입구에 세워뒀기 떄문에 여기서 택시를 타고 관음사 입구로 다시 갔는데, 미터기를 꺾지 않고 17,000원을 현금으로만 받습니다. 택시 기사의 말을 들으니 8시간이면 약간 빨리 다녀온 거고 보통 9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네요. 남한 최고(最高)의 산이기에 저도 겁먹고 시작했는데, 막상 올라가 보면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제주도를 여행하면서 한라산을 아직 안 가 봤다면, 제주의 즐거움 중 아직 하나가 남아있는 셈입니다. 날씨만 도와준다면 하루 정도를 투자할 가치가 충분할 것 같은데, 가까운 휴가엔 한라산 한 번 어떠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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