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여행을 알래스카로 다녀왔다는 친구의 페이스북 포스트를 보다가 앵커리지 국제공항에 대한 글이 있어서 이 친구의 글을 살짝 보충하는 ‘라이트 항덕’ 차원에서 아는 내용+구글신 도움을 받아 정리해 봅니다.
앵커리지 '테드 스티븐스 앵커리지 국제공항의 항공차트
저 페이스북 글에 있는 것처럼 앵커리지 국제공항은 현재는 여객 국제선을 취급하지 않는 희한한 국제공항입니다. 하지만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앵커리지 국제공항은 서방 대부분의 항공편이 대륙 간 여객 수송을 할 때 꼭 한 번씩은 들러야 하는 매우 중요한 ‘포커스 시티’ 역할을 해 왔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위용을 떨치던 냉전 시기, 앵커리지는 우리나라 항공사가 유럽에 갈 때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1975년, 처음으로 파리에 취항한 대한항공은 지금은 사라진 항공기 제조사인 맥도널 더글러스사의 DC-10을 파리에 띄웁니다. 이 비행기의 최대 항속거리는 1만km 정도로 1960~1970년대 항공기 치고는 제법 긴 항속거리를 가진 비행기였지만, 역시 소련 상공을 통과하지 못한 채 캄차카 반도 옆으로 'V턴' 해야 했던 당시에는 논스톱 비행이 불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앵커리지에 중간기착.
대한항공의 DC-10 항공기 (출처 : Airliners.net)
대한항공은 ▲1983년 들어 이 노선의 주력 항공기를 대한항공을 키워준 1등공신 보잉 747로 교체하고, ▲다음해 서울-앵커리지-프랑크푸르트 취항,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서울-앵커리지-런던 취항, ▲또 그 다음해 암스테르담과 취리히 취항 등으로 사세를 확장해 갔습니다.
대한항공이 세계적 항공사로 성장하는 데 말 그대로 ‘교두보’ 역할을 했던 앵커리지 공항은 1990년 이후 크게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냉전이 끝났으니까요. 1990년 독일 통일,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가 이어지면서 유라시아 대륙권 항공사들이 바라 마지않던 대로 소련 영공이 서방 항공사에게도 개방됐기 때문입니다. 유럽행 항공기의 앵커리지 시대는 1990년 이후 냉전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런 항로는 1991년 이후에나 가능해졌습니다. (출처 : Flightradar24)
앵커리지 공항에 중간기착하는 항공기는 거의 대부분 구주행이었습니다. 다만 1999년~2001년 사이 미주인 토론토를 오가는 항공편이 앵커리지에 중간기착하는 노선이 하나 있었습니다. 서울-미국 동부 직항도 가능한 747-400을 집어넣고도 중간기착을 해야 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김포국제공항의 폐쇄 시간(커퓨 타임) 때문이었습니다. 제 검색 능력이 꽝이라 정확한 시간 정보를 찾을 수가 없는데, 당시 토론토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편이 직항을 하게 되면 도착 시간이 김포공항의 폐쇄 시간(밤11시~아침 6시) 사이에 걸렸다고 합니다. 도착 시간을 미뤄야 했던 대한항공은 연료를 반만 실어 앵커리지에 기착, 여기서 기름을 한 번 다시 채우고 서울까지 날아오는 식으로 길어진 비행시간에 대한 손해를 만회했겠죠. 2001년 이후 이 노선이 다시 직항으로 바뀐 이유도 간단히 정리됩니다. 경축 24시간 잠들지 않는 인천국제공항 시대 개막.
21세기 들어 여객운송량이 크게 떨어진 앵커리지 공항이지만 대한항공에서는 그 이후에도 ‘앵커리지 사랑’을 보인 적이 있습니다. 2003, 2005, 2006, 2011 이렇게 4개년에 걸쳐 7, 8월 한정으로 앵커리지 계절편 직항을 띄운 적이 있습니다. 당시 알래스카 여행편 광고가 제 뇌리엔 아직 매우 깊이 남아있습니다.
대한항공의 앵커리지 직항 광고
그 외 미주행 항공기는 어땠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미주행 노선은 앵커리지가 아닌 호눌룰루를 사랑했습니다. 이유는 아래 자세히 적겠습니다. 대한항공의 대표노선 KE001/002편이 1972년 처음으로 서울-도쿄-호눌룰루-LA라는 어마무시한 이착륙을 반복하면서 미국행 노선의 첫 발을 뗍니다. 동시에 KE005/006편을 단 노선은 도쿄를 거치지 않고 호눌룰루-LA로 바로 날았습니다.
다만 미주 노선 ‘직항 시대’는 유럽 노선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빨랐습니다. 대한항공이 서울-LA 직항 노선을 처음 띄운 해가 1979년. 당시 항공기로도 유럽, 미국 서부 도시는 직항이 가능한 항공기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위에 언급했던 서울-파리 첫 취항 당시 대한항공이 투입한 DC-10 항공기 역시 서울-LA 직항 노선을 함께 담당했습니다.
그럼 호눌룰루 시대의 종식도 앵커리지 때보다 더 빨랐을까요. 찾아보니 아니더랍니다. 대한항공은 1995년까지 서울-호눌룰루-LA 노선을 잘도 굴려먹었습니다. 심지어 앵커리지에 망조의 기운이 스물스물 엄습하던 1989년에 대한항공은 주 4회 운항하던 서울-호눌룰루-LA 노선을 주 10회로 오히려 증편합니다. 어차피 LA행 수요는 넘쳐나고, 하와이행 수요도 적지 않으니 LA 직항 노선과 호눌룰루-LA 노선을 함께 돌려도 그만큼 손님을 꽉꽉 채워 비행기를 날릴 수 있었겠죠.
자 그럼, 미주행 노선은 왜 북극항로를 사용하지 않았는지 지금부터 좀 살펴볼까요.
엄밀히 얘기하면 미주행 노선이 북극항로를 아예 쓰지 않는 건 아닙니다. 좀 더 자세히는, 서울발 미주행은 태평양 횡단 루트를, 미주발 서울행은 북극항로를 오갑니다.
빨간 선이 인천->시애틀 / 파란 선이 시애틀->인천 (출처 : Flightaware)
우선 가는 데 태평양 횡단 루트를 쓰는 이유는 다름 아닌 바람 이득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국제선 항공기가 주로 날아다니는 고도는 35000~40000피트 사이. 해발 10km 안팎입니다. 그리고 북태평양 상공에서 이 정도 고도에 부는 바람 중에는 그 유명한 ‘제트기류’가 어마무시한 속도로 흐릅니다. 대충 시속 200km 정도. 빠르게 불 때는 400km/h도 분다네요.
2016년 6월 15일 오후 3시(KST)의 10km 상공 제트기류. (출처 : 기상청)
파란 색깔이 100kts(약 180km/h) 안팎.
중심선이 알류산 열도 바로 아래를 지납니다. 위 그림 빨간 선과 비교해 보세요.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제트기류는 항공기가 동아시아에서 미주로 향할 때 뒤에서 비행기를 밀어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당연히 비행기는 더 빨리 더 적은 연료로 목적지에 갈 수 있겠죠. 그래서 태평양 횡단 항로는 바로 이 제트기류를 최대한 타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미국을 자주 오가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미국에 갈 때 걸리는 비행시간이 올 때보다 2시간이나 덜 걸릴 정도로 제트기류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그런데 바람은 시시각각 다르게 부는데? 그래서 태평양 항로도 시시각각까진 아니지만 매일 다르게 변합니다. 미국 연방항공청이 매일 발표하는 이 태평양 횡단 루트의 이름은 PACOTS(PACific Organazed Track System)이라고 부릅니다. PACOTS는 항공기가 제트기류를 타고 적은 연료로 빨리 갈 수 있는 시간과 항속거리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매일 가장 경제적인 항로를 만들어 일반에 공개합니다.
태평양항로 생성 조건. 항공사의 수요, 군사작전, 주요 기상, 그 외(출처: 미연방항공청)
PACOTS와 북극항로의 거리를 비교해보면 인천공항-LA공항 기준 태평양 횡단로가 약 1만km(5450해상마일). 북극항로가 약 1만300km(5550해상마일) 정도가 나옵니다. 1만km를 오가는데 300km 차이면 뭐 별 것도 아니겠지만, 이 정도 거리에 하루에도 십수 대씩, 매일, 기름먹는 하마같은 비행기를 띄우는 항공사 입장에서는 부담이 크겠죠. 그래도 시속 200km씩 되는 바람을 뚫고 가느니 상대적으로 잔잔한 편서풍을 맞으면서 좀 더 먼 거리를 가는 게 좀 더 기름을 아낄 수 있다는 계산값이 나왔겠죠.
+)
위 kini의 페이스북 게시글에 나온 ‘앵커리지 공항의 우동 가게’는 실제로 당시 우리나라보다 해외여행이 먼저 활성화 돼서 유럽을 오가던 일본 사람들에게는 매우 각별한 가게였던 모양입니다. 당시를 추억하는 일본 사람들이 인터넷에 쓴 글을 보면 “특별히 맛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일본 사람에게 우동은 특별한 음식이기 때문에 사먹지 않을 수 없었다”거나 “그 우동가게 주인은 3대 째이고 한국인”라면서 “1대 주인은 정말 일본 본토에서 먹는 맛과 같은 우동을 만들었지만 이후 경영권이 앵커리지 기내식 회사에 넘어가면서 맛이 덜해졌다”는 내용들이 나오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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